지구별 경영을 꿈꾸며: 커이커이의 서재

리서치/4차산업혁명 리포트

전쟁, 질병, 불황의 위기를 승리로 이끄는 설계의 힘 <룬샷, 사피 바칼>

커이커이  2020. 11. 17. 02:00

세상을 뒤흔든 '미친 아이디어'의 힘

 

『 룬샷 (2020) 』

 

 

세상을 주도한 나라들의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세상을 변화시킨 사람들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저자는 다름 아닌 룬샷 (loon shot), 즉 '미친 아이디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러한 창발적 아이디어가 신기술이 되어 세상에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상전이", "동적평형", "임계질량"과 같은 -- 그 이름조차도 어려운 -- 상태들 간의 아슬아슬한 균형을 맞추어야 하고, 그러한 균형을 갖춘 구조, 조직을 만드는 리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책에는 소위 '대박'을 터뜨린, 혹은 그러한 기회를 놓친, 수많은 회사의 이야기들이 나오지만, 그보다도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 또 냉전에서 소련보다 앞설 수 있었던 이유로 제시된 "버니바 부시 보고서"와 "방위고등연구계획국"이 가장 흥미롭게 다가왔다. 전 유럽을 손아귀에 거머쥔 히틀러를 패망으로 이끈 것은 영국과 미국의 레이더 기술이었고, 소련과의 대치 상황에서도 미국이 우세할 수 있었던 것은 디지털 인공위성이었다. 모두 당시에는 쓸데없는 아이디어라고 무시당한 기술들이었지만, 만약 미국이 아닌 적국이 그 기술을 차지했더라면 현재의 세계 패권이 뒤바뀌었을지도 모를, 역사의 변곡점에 해당했던 발견들이었다.

그나마 나같이 평범한 사람에게도 위로가 되었던 것은, 월등한 과학기술력에 바탕을 둔 "제품형 룬샷"보다도 획기적인 아이디어 하나면 충분한 "전략형 룬샷"이야말로, 아메리칸 항공, 마이크로소프트, 애플과 같은 기업들이 오늘 날 전 세계를 대상으로 사업을 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게 된 주요 요인이었다는 점이었다. 결국, 세상을 뒤바꾼 기술들은 천재 과학자에 의해 발명되기에 앞서, 현명한 경영인의 전략과 미래 비전에 의해 탄생한 것이었다.

한편, 미치광이 같은 아이디어를 멸시했다가 '혁신의 희생자'로 전락한 국가들을 생각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중국, 인도, 이슬람 제국, 아니 멀리 갈 것도 없이 이미 조선 패망의 역사가, 변화와 혁신에 문을 꼭꼭 닫은 조직의 운명을 너무나도 절실히 잘 보여주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의 시대라며,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세상이 변해가고 있는 우리 세대. 과연, 이 시대에 우리나라는, 우리 회사는, 그리고 나 자신은, 혁신의 주도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희생자가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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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모든 상전이는 (물속에서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결합 에너지와 엔트로피처럼) 경쟁하는 두 힘이 만들어낸 결과다. 사람들이 하나의 팀이나 기업, 혹은 어떤 형태든 목적을 가진 조직을 이룰 때도 경쟁하는 두 힘이 만들어진다. 말하자면 두 가지 형태의 인센티브(동기부여 요소)가 생기는 셈이다. 이 경쟁하는 두 가지 인센티브를 대략 '판돈'과 '지위' 정도로 생각할 수 있겠다.

예를 들어 집단의 규모가 작을 때는 집단 프로젝트의 결과에 따라 누구에게나 큰 '판돈'이 걸려 있다. 작은 바이오테크 회사에서 신약 이 성공하면 모두가 영웅 대접을 받거나 백만장자가 된다. 실패하면 모두 실업자다. 이렇게 큰 판돈에 비하면 '지위'에 따른 특전(승진에 따른 연봉 인상이나 직책명의 변경 따위)은 미미해 보인다.

팀이나 회사의 규모가 커지면 결과에 따라 주어지는 ‘판돈’은 줄어드는 반면, '지위'에 따른 특전이 커진다. 이 두 가지 조건의 크기가 역전될 때 시스템이 전환된다. 두 인센티브는 누구도 원치 않는 행동을 부추기기 시작한다. 조직이 커지고 안정될수록 똑같은 사람으로 구성된 똑같은 집단임에도 룬샷을 퇴짜 놓기 시작한다.

나쁜 소식은, 상전이가 피할 수 없는 현상이라는 점이다. 모든 액체는 얼어붙는다. 좋은 소식은, 이 힘들을 잘 이해하면 상전이를 관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물은 0도에서 얼어붙는다. 그러나 눈이 오는 날이면 길에 소금을 뿌려서 물의 어는점을 낮출 수 있다. 이러면 눈은 딱딱한 얼음이 되지 않고 녹아버린다. 얼음에 미끄러져 일주일을 입원하느니 진창에 신발이 젖는 편이 낫다.

똑같은 원칙을 이용하면 더 좋은 물질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철에 탄소를 조금만 추가하면 훨씬 강한 물질인 강철이 만들어진다. 강철에 니켈을 추가하면? 우리가 아는 가장 튼튼한 특수강들, 제트기 엔진과 원자로에 쓰이는 특수강을 만들 수 있다.

우리는 앞으로 상전이의 원리를 활용해서 어떻게 하면 더 혁신적인 조직을 만들 수 있을지 알아볼 것이다. '문화'가 아니라 '구조'의 작은 변화를 통해 경직된 팀을 탈바꿈시킬 수 있다.

리더들은 많은 시간을 들여 혁신을 역설한다. 하지만 온도가 떨어 지고 있는데, 분자 하나가 절박하게 애쓴다고 해서 주변 분자가 얼음이 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구조의 작은 변화는 강철도 녹일 수 있다.

# 2

미국의 국가 추진 연구 과제 목록을 개발해 오바마 Barack Obama 대통령에게 추천하는 위원회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첫날 위원장이 우리의 미션을 알려주었다. 국가 추진 연구를 통해 향후 50년간 계속해서 이 나라의 행복과 안전을 증진시키려면 대통령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의장은 차세대 ‘버니바 부시 Vannevar Bush 보고서’를 만드는 게 우리의 과제라고 말했다.

버니바 부시? 그때까지 나는 버니바 부시라는 사람의 이름이나 그의 보고서에 관해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곧 그가 2차 세계대전 중에 새로운 시스템을 개발한 사람이라는 것, 그 시스템이 획기적인 여러 아이디어를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만들어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부시가 만든 시스템은 연합군이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도록 도왔고, 이후 미국은 과학과 기술 분야에서 전 세계를 선도하게 됐다. 버니바 부시의 목표는 간단하면서도 단호했다. ‘미국은 혁신의 주도자가 되어야지, 희생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 3

부시는 대통령의 삼촌을 통해 루스벨트와 지근거리였던 참모, 해리 홉킨스 Harry Hopkins를 만났다. 홉킨스는 사회 사업을 하던 사람으로 공상적 개혁가들의 우두머리 격이었으니, 그가 부시의 지지자가 되어 줄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나중에 부시는 이렇게 썼다. "홉킨스와 내가 죽이 맞았던 것은 작은 기적의 하나다." 두 사람은 정말로 죽이 척척 맞았다. 홉킨스는 대담한 아이디어를 좋아했다.

1940년 6월 12일 오후 4시 30분 부시와 홉킨스는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에서 루스벨트를 만났다. 두 사람의 메시지는 다음과 같았다. '우리 육군과 해군은 다가올 전쟁을 이기는 데 꼭 필요한 기술 면에서 독일에 한참 뒤처져 있다.' 군 스스로는 제때에 그 기술 격차를 따라 잡을 수 없었다. 부시는 루스벨트에게 연방정부 내에 새로운 과학 기술 그룹을 만들어달라고 했다. 부시가 수장이 되어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할 수 있는 체제로 말이다.

그 말을 경청하며 부시의 제안서(종이 한 장 가운데에 달랑 짧은 문단 네 개로 적힌 게 전부였다)를 읽은 루스벨트는 "오케이 _ 프랭클린 델러 노 루스벨트"라고 서명했다. 회의는 10분 만에 끝났다.

결국 과학연구개발국 Office of Scientific Research and Development, OSRD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는 새 조직은 부시가 대학과 민간 연구소의 과학자 · 엔지니어 · 발명가들을 찾아내 괴상한 것을 탐구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낸다. 유망하지만 바람 앞 등불처럼 위태로운 전국 각지의 아이디어들을 보호하고 확산시킬 국가기관이, 룬샷을 위한 국가 기관이 출범한 것이다. 과학연구개발국은 군에서 자금 지원을 꺼리는 증명되지 않은 기술을 개발하고, 그 수장은 '빌어먹을 교수'가 맡을 예정이었다.

예상대로 군과 그 지지자들은 격렬히 반대했다. 그들은 부시에게 새 조직이 "기존 채널 밖에서 활동하는 몇 안 되는 과학자와 엔지니어 무리가 신무기 개발에 필요한 돈과 권한을 탈취해 가려는 수작"이라고 말했다.

부시는 이렇게 썼다. "실은 정확한 관찰이었다."

# 4

통신 장비를 테스트하던 영과 테일러는 우연히도 '탐지 장비'를 발견 한 것이었다.

두 엔지니어는 이 실험을 여러 차례 더 시도해 성공했고, 며칠 뒤 9월 27일 상사에게 편지를 보내 어떤 환경에서도 적선을 탐지 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설명했다. 미국 선박들이 함께 다니면서 송신기와 수신기를 갖춘다면 "안개나 어둠, 연막에 상관없이 (...) 적군의 선박이 지나는 것을" 즉각 탐지할 수 있다고 말이다.

알려진 바로는 이게 전투에서 레이더 사용을 제안한 최초 사례다. 나중에 어느 전쟁 사학자는 레이더 기술이 "비행기가 개발된 이래 단일 발전으로는 가장 많이" 전쟁의 양상을 바꿔놓았다고 썼다. 그러나 해군은 이 제안을 무시했다.

영과 테일러는 그들의 제안을 지지해주는 사람도 없고 요청한 자금 지원도 거부되자 아이디어를 포기했다. 두 사람은 해군의 다른 무선 통신 프로젝트에서 일했으나 이 아이디어를 잊지는 않았다. 8년 뒤인 1930년대 초 영은 같은 연구실에 있던 엔지니어 로런스 하일랜드 Lawrence Hyland와 함께 비행기 착륙을 도와줄 새로운 아이디어를 시험해보기로했다...

두 사람은 면밀한 검증 과정을 거친 후 또 한 번 전쟁터에서 듣도 보도 못한 무언가를 제안하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것은 적군 항공기에 대비한 조기 경보 시스템이었다.

역시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5000 달러의 자금 지원 요청은 거부 당했다. 결과를 보려면 "2~3년이 훌쩍 지날 수도 있다"는 게 이유였다. 또 다른 사무직 간부는 이 아이디어가 현실성 없는 이유를 열거하며 "성공할 가능성이 전혀없는 허무맹랑 한 꿈"이라고 일축했다. 군이 이 프로젝트에 전담 인력을 배치하는 데는 5년이 걸렸다.

해군 내에서 레이더 개발을 촉구하려고 힘든 싸움을 벌인 어느 장교는 나중에 이렇게 회상했다. "1941년 이전에 2년간만 레이더를 사용해봤더라면, 태평양전쟁 초기에 얼마나 많은 생명과 비행기, 군함을 구하고 얼마나 많은 전투에서 이겼을지 생각하니 (…) 정말로 고통스러웠다."

1941년 12월 7일 아침, 레이더 조기 경보 시스템은 아직 하와이에 현장 테스트 중이었다.

그날 일본군의 항공기 353대가 진주만을 기습 공격했고 2403명이 전사했다.

# 5

부시의 조직이 내놓은 수륙양용 트럭 제안서를 본 어느 고위 장교는 부시에게 이렇게 말했다. "군은 그런 물건을 원하지 않고, 갖게 된다고 해도 사용하지 않을 겁니다." (부시는 그의 말을 무시했다. 'DUKW'라고 하는 이 트럭은 전쟁 후반기에 널리 사용됐다.) 부시의 이전 동료였던 대학 연구진들 역시 어떤 식으로든 군과 관계를 맺는데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과학자들은 정부의 감독이라면 무엇이든 간섭으로 이해했다.

부시는 두 집단을 규합해야했다. 과학자들에게는 학자로서 자신의 신망을 이용해 독립성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목표는 단순히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놓는 것 이상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들의 목표는 실전에 쓸 수 있는 물건을 만드는 일이었다. 부시는 새로운 팀원이 될 과학자를 뽑을 때 다음과 같이 난감한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한밤중에 고무보트를 타고 독일군이 점령한 해안에 상륙하려고 합니다. 목표는 적군에게 반드시 필요한 무선 장비를 파괴하는 겁니다. 적군은 무장한 호위병과 군견, 서치 라이트로 무선 장비를 방어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상상할 수 있는 어떤 무기든 휴대할 수 있습니다. 그 무기를 묘사해보세요. "과학자들은 부시의 메시지를 알아 들었다. 실용성은 생사의 문제였다.

부시는 빠르게 움직였다. 대통령을 만나고 6개월 뒤인 1940년 말이 됐을 때 과학연구개발국은 이미 19개 기업 연구소 및 32개 대학 연구소와 126건의 연구 용역 계약을 체결했다.

# 6

루미스가 레이더 연구를 시작할 즈음 영국에서는 이미 어느 연구 팀이 국가 레이더 방어 시스템을 거의 완성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영국이 레이더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항공성에 살상용 광선 무기를 연구하라는 공개 요구가 있었던 덕분이다. 가장 완강하게 그런 요구를 했던 사람은 다들 무시하던 전직 정부 관료 였는데, 그는 앞으로 런던이 공습을 당할 수도 있다며 고함을 지르곤 했다. 그의 이름은 윈스턴 처칠이라고 했다.) 1930년대 말이 되자 레이더 안테나 망은 영국 해안을 뺑뺑 돌아 에워쌌다.

독일은 1939년 가을 폴란드로 진격했고, 1940년 봄에는 나머지 유럽까지 순식간에 접수했다. 히틀러는 북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 해 6월 처칠은 의회에 나와 이렇게 선언했다. "영국에서도 곧 전투가 시작될 겁니다. (…) 히틀러는 영국 본토를 치지 않고서는 전쟁에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어 처칠은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연설 중 하나가 될 말을 남겼다. "그러니 이제 다 함께 전열을 가다듬고 우리의 의무를 다합시다. 대영 제국과 영연방이 앞으로 천년을 지속하더라도 사람들이 여전히 '그때가 저들의 가장 멋진 순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게 행동합시다."

1940년 7월 히틀러는 영국 본토를 공습했다. 독일 공군이 영국 공군보다 두 배나 많은 비행기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히틀러 휘하의 장군들은 2주에서 4주면 공중전에 우위를 점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동안 유럽 전역에서 이미 그래왔기 때문이다. 히틀러의 장군들은 공중전에서 승리하고 나면 해상으로 영국에 상륙한다는 '바다사자작전'까지 수립해두었다.

그러나 독일은 영영 공중전에서 승리하지 못했다. 영국 해안을 뺑뺑 둘러싼 레이더 안테나 망 덕분에 영국 공군은 적기가 해안 근처에 오기도 전에 적을 탐지할 수 있었다. 레이더가 전달하는 정보에 힘입어 영국은 공격을 받을 때마다 한정된 병력을 효율적으로 전장에 투입할 수 있었다.

영국인들이 '영국 전투 기념일'로 기념하는 9월 15일, 144명의 독일 조종사와 승무원이 격추당하는 동안 영국 공군 사상자는 열세 명에 불과했다. 한 시간 만에 항공기의 3분의 1을 잃은 어느 독일군 부대의 폭격기 조종사는 이렇게 썼다. "그런 임무가 또 내려온다면 우리의 생존 확률은 0이다."

이틀 뒤 히틀러는 영국 상륙 침공을 무기한 연기했다. 10월 말이 되자 독일군의 공격은 끝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이 전쟁에서 독일이 패배한 최초의 전투였다.

# 7

커네이디언 스타호가 침몰한 그달, 미국 육군 항공대 'B-24 리버레이터 Liberator' 폭격기가 대서양에 배치된다. 리버 레이터는 루미스의 팀이 만든 새로운 기기 두 가지를 장착하고 있었다. 첫 번째 기기는 강력한 마이크로파 레이더였다. 30개월도 안되어 개발된 이 레이더는 밤낮으로, 구름이나 안개도 뚫고, 수면으로 올라온 잠수함의 잠망경까지 탐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광대한 바다에서 잠수함을 사냥하려면 비행기들이 호출을 받았을 때 재빨리 수송대의 위치를 찾아내 그곳으로 날아갈 수 있어야 했다. 별을 보고 위치를 찾아간다는 것은, 특히나 날씨까지 궂은 날이면 거의 불가능했다. 루미스의 팀은 또 다른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다. 전파 신호망을 구성해 대서양 전체를 커버하는 것이었다. 특별히 설계된 해독기를 사용하면 조종사는 적군의 선박에 들키지 않고 그 망 위 자신의 위치를 계산할 수 있었다.

1943년 봄이 되자 마이크로파 레이더와 무선항법 장치를 탑재한 장거리 리버레이터 폭격기들이 완벽하게 가동되어 대서양을 정찰하기 시작했다...

5월 11일 'SC-130'으로 명명된 37척의 수송대가 캐나다를 떠나 동쪽으로 영국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엿새 후 통신 신호를 가로챈 독일 정보국은 항로를 파악하고 이리 떼 같은 25척의 잠수함에 그 정보를 알렸다. 5월 18일 저녁 수송대는 대서양 한가운데서 이리 떼 중 첫 번째 U보트와 마주쳤다. 수송대의 호위선 지휘관이었던 피터 그레턴 Peter Gretton은 무전으로 지원을 요청했다. 몇 시간 만에 리버레이터 폭격기들이 도착했다. 폭격기의 마이크로파 레이더는 어둠과 안개도 통과했다. 보이지 않던 잠수함들이 오실로스코프 스크린에 환하게 나타났다.

모습을 드러낸 U보트들을 그레턴과 폭격기들이 모조리 사냥했다... 사흘간의 전투 동안 독일의 U보트는 단 한 차례의 공격도 성공시키지 못했다. 베를린의 있는 되니츠는 대서양 전역의 U보트 지휘관들로부터 비슷한 메시지를 받았다. 폭격기에 의해 계속 물속에서 쫓기고 있고 피해가 늘어나고 있다고.

U보트는 사냥꾼에서 사냥감으로 전락했다.

5월 20일 되니츠는 SC-130 수송대와 싸우고 있는 U보트 군단에 무전을 쳤다. "수송대 공격 작전 중단." 전투가 끝났다. 연합군은 선박을 한 척도 잃지 않았다. U보트는 세 척이 침몰했고 승조원 전원이 바다에 수장됐다. 그중 한 척에는 첫 임무에 나섰던 스물한 살의 장교도 타고 있었는데, 되니츠의 아들이었다.

연합군의 비행기와 선박은 5월에만 모두 41척의 U보트를 침몰시켰다. 전쟁이 시작되고 3년간 '고작 한 달 만에' 이렇게 많은 잠수함을 침몰시킨 적은 없었다. 되니츠가 지휘하는 작전 함대의 3분의 1에 가까운 잠수함이었다. 5월 24일 결과가 뻔히 눈앞에 그려지자 되니츠는 대서양에서 U보트를 철수시켰다. 그해 말 되니츠는 이렇게 썼다. "지난 몇 달간 적들은 U보트 전쟁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저들의 전략이나 전술이 우리보다 뛰어나서가 아니라 과학 분야의 우위를 바탕으로 그런 일을 쟁취했다. 현대 전투에서는 그런 우위를 '탐지 능력'이라고 부른다."

90일 만에 연합군의 선박 피해 규모는 3월 51만 4000톤에서 6월에는 2만 2000톤으로 95퍼센트가 줄었다. "우리는 대서양 전투에서 패했다." 되니츠는 이렇게 썼다.

U보트는 다시는 수송대를 위협할 수 없었다. 이제 연합군이 유럽을 공격할 길이 활짝 열린 셈이었다.

# 8

레이더가 전쟁의 향방에 미친 영향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컸다. U 보트와 싸우는 것 이상으로 말이다. 비행기에서 레이더를 이용해 목표물을 찾아내게 되자 연합군은 날씨에 관계없이 밤낮으로 적군의 보급품과 교량, 이동 수단 등을 정교하게 폭격할 수 있었다. 레이더로 조종하는 대공포는 항공모함을 방어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고,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과 싸울 때 결정적 우위를 제공했다.

1944년 독일은 런던에 최초의 로켓 추진 미사일 V-1 '폭명탄'을 투하했다. 폭명탄은 곤충 울음소리 같은 무시무시한 소리 때문에 폭탄이 접근하는 것을 희생자들도 즉각 알 수 있었다. 큰 돈을 들여 개발한 폭명탄을 히틀러는 기적의 무기라고 선전했다. 적의 항공기는 손도 대지 못할 이 폭탄이 연합군을 몰살시킬 거라고 말이다. 독일이 마지막으로 희망을 걸었던 공습이었다. 하지만 레이더 덕분에 연합군의 대공포는 폭명탄을 추적할 수 있었고 금세 격추해 버렸다.

레이더는 또 1944년 말 벨기에에서 벌어진 벌지 전투 Battle of the Bulge에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벌지 전투는 독일이 마지막 희망이라 여긴 육로 공격이었고 연합군을 깜짝 놀라게 했다. 미국 육군은 레이더를 장착한 새로운 퓨즈가 달린 포탄을 사용했다. 이 퓨즈는 목표물에 가까워지면 폭발하게끔 설계되어 있어서 폭격 효율을 일곱 배나 높여 주었다 (일곱 배 많은 수의 대포를 갖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연합군이 승리한 이후 패튼 George Patton 장군은 이렇게 말했다.

"그 재미난 퓨즈가 벌지 전투에서 우리에게 승리를 가져다 줬다."

# 9

부시는 전쟁 이전에 미국 과학계에 대한 지원이 형편 없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또 기초과학 연구와 관련해 다른 나라 연구진에 의존하는 관행을 바꿔놓지 않으면 나라의 장래를 기약할 수 없다는 사실도 잘 알았다. 나중에 부시는 이렇게 썼다. "초토화 된 유럽이 계속 기초학문을 공급해줄 거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위 대화가 있고 얼마 후 루스벨트는 부시에게 과학 지원을 위한 국가 계획의 대요를 작성하라는 공문을 보냈다. 루스벨트는 전시에 부시가 만든 시스템이 "평화의 시기에 적용하더라도 유익하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다고 썼다.

부시는 몰랐지만 당시 루스벨트는 심각한 심장 질환을 앓고 있었고 이는 전이성 암일 수도 있었다. 공문에서 루스벨트는 의학 연구를 강조했다.

매년 이 나라에서는 우리가 이번 전쟁의 전투로 잃은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한두 가지 질병으로 사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미래 세대에 큰 의무를 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 지성의 새로운 전선이 우리 눈앞에 있습니다. 우리가 이번 전쟁을 헤쳐 나올 때 가졌던 비전과 대담함, 추진력을 가지고 이 새로운 전선을 개척한다면 더 의미 있는 고용을 더 많이 창출할 뿐만 아니라 더 충만하고 보람찬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루스벨트가 죽고 두 달 지난 1945년 6월 부시가 해리 트루먼 Harry S. Truman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그 다음 달에 공개한 <과학: 그 끝없는 전선 Science: The Endless Frontier>이라는 보고서는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부시는 미국에 과학 정책이라는 게 없다고 단언했다. "기술 발전의 페이스 메이커"인 기초과학 연구 자금을 자선사업이나 민간 기업에만 의존할 수는 없다. 기초과학 연구는 국가 안보와 경제 성장, 질병 퇴치에 필수적이다. 이 보고서는 새로운 국가적 연구 시스템의 큰 그림을 제시했다.

보고서가 발표되고 며칠이 지나자 온갖 주요 언론이 부시의 보고서를 극찬했다. 다만 《뉴욕 타임스 The New York Times》는 보고서의 결론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부시(와 41 명의 공동 저자 박사들)에게 과학의 본질을 찬찬히 설명했다. "연구 대상이 레이더이든 질병이든 과학적 방법은 늘 동일하다. 부시 박사의 보고서는이 점을 무시하고 있다." 《뉴욕 타임스》는 더 나아 보인다는 모델을 제시하며 기사를 마무리했다. "이 과업에 대한 접근법은 소련의 방식이 더 현실적이다."

어찌 되었건 부시를 "학자일 뿐만 아니라 실용성을 중시하는 비즈니스 맨"이라고 옹호한 《비즈니스 위크》는 <과학: 그 끝없는 전선>이 "신기원을 이룬" 논문이며 "미국의 사업가라면 반드시 읽어봐야 할" 글이라고 했다.

오래지 않아 예언력에서는 《비즈니스 위크》가 《뉴욕 타임스》보다 뛰어난 것으로 밝혀졌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서는 업계를 바꿔놓고 새로운 산업을 창출할 발견들이 수백 가지 이어졌다. 그중에는 GPS, 개인용 컴퓨터 PC, 바이오 산업, 인터넷, 심박 조율기, 인공심장, MRI, 소아 백혈병에 쓰이는 화학요법, 심지어 구글Google 검색 알고리즘의 원형까지 있었다. 모두 부시의 보고서에 자극받아 만들어진 시스템을 통해 탄생한 작품들이었다. 예컨대 고체의 띠 이론이나 고품질 게르마늄 혹은 실리콘 결정을 만드는 기술에 연방정부가 투자하지 않았다면 전자 시대를 열어 줄 트랜지스터는 결코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발명의 영향력을 수치로 나타내거나 민간과 공공 투자의 기여분을 구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경제학자들은 한 가지 척도로서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GDP 성장분의 대략 '절반'에 해당하는 수조 달러가 기술 발전 덕분인 것으로 평가한다.

부시의 아이디어를 평화의 시기에 '유익하게 적용'하여 향후 어떤 성장을 이루게 될지는 부시 본인도, 루스벨트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실제로 비즈니스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긴 했다. 사실 부시의 시스템은 비즈니스 세계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 10

베일은 CEO가 되고 나서, 미국인들이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전국 어디든 누구에게든 전화를 걸 수 있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AT&T 내부에서 베일의 약속을 믿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동부의 뉴욕에서 서부의 샌프란시스코까지는커녕 가까운 거리조차 전화가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전화선을 타고 가다 보면 전기 신호가 약해지는데도 아무도 그 원인을 정확히 설명하지 못했다. 전자라는 게 발견된 지 10년밖에 안 되던 때였다. 해답의 열쇠를 쥐고 있는 양자 역학이 나오려면 20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베일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과학적 원리에 기초한, 아직 존재하지 않는 기술이 필요했다.

베일은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기초'연구를 수행하는 별도 그룹을 만들어야 한다며 이사진을 설득했다. 베일도 부시와 마찬가지로 파격한 아이디어들을 격리시켜 보호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괴상한 것들을 자유롭게 탐구할 수 있는 부서, 즉 미치광이 loon들이 운영하는 룬샷 부서가 필요했다. 베일은 MIT 출신 물리학자 프랭크 주잇 Frank Jewett을 책임자로 임명했다. 이후 몇 년간 주잇의 그룹은 과학적 원리를 파고 들었고 결국은 신호가 약해지는 문제를 해결했다. 이들은 진공관을 발명했다. 모든 현대 전자 기기의 전신인 세계 최초의 증폭기였다.

베일이 경영권을 넘겨받은 지 8년이 채 안 된 1915년 1월 25일, 뉴욕에 있는 베일의 사무실 15층 회의실에 수백 명의 사람이 모여들었다. 은퇴 중에 불려 나온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토머스 왓슨 Thomas Watson에게 전화를 걸었다. 두 사람이 보스턴에있는 두 빌딩에서 세계 최초의 전화 통화를 나눈 지 39 년만이었다. 왓슨이 전화를 받았다.

벨이 말했다.“왓슨 씨, 이쪽으로 와요. 만납시다.

"왓슨이 대답했다. “이번에는 그리로 가려면 족히 일주일은 걸리겠는데요."

나중에는 '벨 전화연구소 Bell Teleplhone Laboratories'로 불리게 될 베일의 조직은 이후 50년간 트랜지스터, 태양 전지, CCD 칩(모든 디지털 카메라에 들어간다), 지속적으로 작동하는 최초의 레이저, 유닉스 OS, C언어를 개발했고 여덟 번의 노벨상을 수상했다. 벨은 역사상 가장 성공한 기업 연구소를 세웠고, 그 결과 AT&T는 미국 최대 회사로 성장했다.

# 11

구조를 설계하는 자가 지배한다.

천재 기업가가 새로운 아이디어나 발명품을 가지고 건설한 제국이 오랫동안 건재하면 그를 둘러싼 신화가 널리 퍼진다... 그러나 정말로 성공을 이루는 사람들, '우연의 설계자들'은 그보다 덜 화려한 역할을 맡는다. 그들은 어느 한 룬샷을 열렬히 지지하기보다는 많은 룬샷을 육성할 수 있는 뛰어난 구조를 만든다. 그들은 예지력 있는 혁신가라기보다 세심한 정원사에 가깝다. 그들은 룬샷과 프랜차이즈 양 쪽을 모두 잘 돌보며,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압도하지 못하게 한다. 서로가 서로를 성장시키고 지원하게 하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다.

이런 정원사가 만들어내는 구조에는 공통된 원칙들이 있다. 그런 원칙들을 나는 '부시-베일 법칙'이라고 부른다.

'부시-베일 법칙'의 첫 두 가지는 앞서 '0도에서 균형 잡기' 핵심 열쇠로 언급했다. 상태들(룬샷을 만들어내는 그룹과 프랜차이즈를 이어가는 그룹)을 분리하고, 동적평형(양쪽 그룹 사이에 프로젝트나 피드백이 수월하게 오가는 상태)을 조성하라. 분리되는 동시에 서로 계속 연결되게 하라...

조직도에 박스 하나를 더 그려 넣고 새로운 건물을 하나 임차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번쩍이는 연구소를 갖고도 실패한 기업은 많다. 진정한 상분리가 되려면 맞춤식 니즈를 충족하는 맞춤식 집이 필요하다. 각 상태의 니즈에 딱 맞는 별개의 시스템이 필요하다.

버니바 부시는 레이더 연구팀을 MIT에 있는 이름 없는 사무용 건물에 격리시켰다. 부시는 앞서 언급한 군대에 필요한 긴장된 조직이 괴상한 것을 탐구하는 과학자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연구소에 적합한 조직이 전장에 있는 전투 연대에 적합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시어도어 베일은 장거리 전화 기술 연구팀을 맨해튼 남부에 있느 어느 사무용 건물에 격리시켰다. 베일도 부시처럼 시스템을 딱 맞게 바꾸었다. 그 역시 전화 사업의 "엄격한 과업 할당 방식과는 거리가 먼", 간섭이 적은 방식을 택했다.

부시도, 베일도 오늘날 우리가 계속 재발견하는 사항을 이미 수십 년 전에 직관적으로 알고 있었다. 식스 시그마 Six Sigma 나 전사적 품질경영 Total Quality Management처럼 효율을 중시하는 시스템은 프랜 차이즈 프로젝트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예술가들을 숨 막히게 한다. 예컨대 포스트잇과 스카치테이프를 발명했던 3M이 2000년에 식스 시그마의 열혈 전도사를 새 CEO로 들이자, 혁신은 곤두박질쳤다. 이런 상황은 그 사람이 떠나고 새로 부임한 CEO가 옛 시스템을 복원한 후에도 한참이 지나서야 회복될 수 있었다. 새로 부임한 CEO는 효율주의 시스템을 실수라고 설명했다.“할당된 발명 개수를 채우지 못 했으니 수요일에 좋은 아이디어 세 개, 금요일에 좋은 아이디어 두 개를 생각해내야겠어...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죠." 은퇴한 포스트잇 발명가 아트 프라이 Art Fry는 자신의 아이디어가 그 새로운 체제에서라면 결코 빛을 보지 못했을 거라고 말했다.

# 12

애플 첫 재임 시절에 스티브 잡스는 맥 Mac 컴퓨터를 연구하던 자신의 룬샷 그룹을 "해적들” 내지는 "예술가들"이라고 불렀다 (물론 그는 본인이 최고의 해적이자 예술가라고 생각했다). 반면 애플 Ⅱ 프랜차이즈를 개발 중이던 그룹은 "평범한 해병"이라고 일축했다. 잡스가 예술가를 떠받들고 병사를 업신여김으로써 두 그룹 사이에 형성된 적대감이 얼마나 컸던지, 사람들은 두 그룹이 각각 입주해 있던 건물 사이의 샛길을 '비무장 지대 '라고 불렀다.

이 적대감은 양쪽 제품 모두에 손해가 됐다. 잡스와 함께 애플을 설립한 스티브 워즈니악 Steve Wozniak은 다른 중요 직원들과 함께 남아 애플 Ⅱ 프랜차이즈 개발을 계속했다. 잡스가 아끼던 맥 컴퓨터는 시장에 출시됐으나 상업적으로 실패했다. 애플은 심각한 재정 압박에 직면했다. 잡스는 축출됐고 존 스컬리 John Sculley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결국 스컬리가 맥 컴퓨터도 구해내고 재정 안정성도 회복했다).

12년이 흘러 다시 애플로 돌아온 잡스는 조니 아이브 Jony Ive 같은 예술가와 팀 쿡 Tim Cook 같은 병사를 똑같이 사랑하는 법을 터득한 상태였다. 기회를 동등하게 부여하는 능력을 우리가 타고 나기는 어렵다. 하지만 연습을 통해 키울 수는 있다.

# 13

테일러의 팀에서 더 많은 정보를 알아 낸 파슨스는 즉각 5000달러의 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경악스럽게도 요청은 거절되었다. 테일러를 침묵하게 만들었던 그 똑같은 회의적 시선이 파슨스의 전투욕을 자극했다. 파슨스는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는 세일즈맨의 집요함으로" 해군 부서장들을 일일이 찾아 다니며 아이디어를 소개하고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그의 경력이 위험해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파슨스는 해군 연구소에 있는 과학자들에게 다시 힘을 불어넣었다. 그는 테일러에게 용기를 북돋워 처음으로 이 프로젝트에 전담 엔지니어 한 명을 배치하게 했다. 전담자가 된 로버트 페이지 Robert Page는 연속적 신호가 아닌 펄스형 신호를 이용해 중요한 돌파구를 만들었다. 파슨스는 최고위 해군 장교들이 이 프로젝트를 위해 나서서 싸우도록 설득했다. 파슨스는 잠자던 곰이 깨어날 때까지 찌르고 또 찔렀다.

세월이 한참 흐른 후, 전쟁 중에 대공 선박 보호를 감독했던 프레더릭 엔트위슬 Frederick Entwistle 해군 소장과 버니바 부시는 파슨스의 공을 치하했다.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됐을 때 실전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레이더가 준비되어 있던 것은 모두 파슨스 덕분이라고 말이다. 이게 바로 프로젝트 수호자다.

오늘날에는 발명가와 수호자의 역할을 분리할 줄 아는 훌륭한 바이오테크 회사나 제약회사가 많다. 그 곳에선 프로젝트 수호자의 능력(파슨스의 능력)을 발휘할 이들을 훈련하고 그들의 권위를 높여준다. 이게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다. 창의적 측면에서 보면 발명가(예술가)들은 남들이 자기 작품을 저절로 알아줄 거라고 생각할 때가 많다. 비즈니스 측면에서 보면 라인 매니저(병사)들은 아무것도 만들거나 팔지 않는 사람, 그저 어느 아이디어를 내부적으로 홍보할 뿐인 사람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훌륭한 프로젝트 수호자는 단순한 홍보 역할을 훌쩍 넘어선다. 그들은 두 가지 언어를 구사하는 전문가로, 예술가의 언어와 병사의 언어 모두에 능하기 때문에 양측을 한자리에 불러 모을 수 있다.

이런 수호자 역할을 만들어두면 이를 못마땅해하는 사람들도 있다.하지만 그걸 잘하는 팀이나 회사는 해군이 레이더와 관련해 겪었던 일을 겪지 않아도 된다. 그럴 경우 훌륭한 수호자가 없어서 위대한 아이디어가 땅에 묻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 14

전산화된 예약 시스템을 아메리칸 항공이 처음 개발한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로 잘 작동하는 시스템은 처음이었다. 모든 항공사의 운임이 표시되는 '세이버 Sabre'라는 시스템은 전국의 여행사에 보급됐다. 한 연구에 따르면, 다른 예약 시스템을 사용하는 여행사들보다 세이버를 사용하는 여행사들이 아메리칸 항공에 적어도 50 퍼센트의 매출을 더 올려주었다고한다. 1 퍼센트의 차이로 판도가 나뉘는 업계에서 이 정도면 정말 큰 차이였다.

... 그러나 세이버는 크랜들과 직원들조차 깜짝 놀랄 아주 중요한 이점을 갖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금까지 그 누구도 보지 못한 데이터들이 마구 밀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수년치 쌓인 예약 데이터들이었다. 어느 분석가는 이렇게 말했다. "이 데이터를 통해 아메리칸 항공은 푸에르토리코로 가는 휴가객들이 며칠 전에 티켓을 예매하는지, 디트로이트로 가는 출장객들이 얼마나 일찍 티켓을 예매하는지, 5월인지 9월인지, 화요일인지 금요일인지 추론 할 수 있게 됐다." 아직 빅데이터가 실리콘 밸리의 유행어가 되려면 30년이나 남았던 시점에 아메리칸 항공은 이미 빅데이터를 손에 쥐었다. 크랜들은 이 데이터를 이용해 좌석 이윤을 극대화하는 방법을 실행하는 부서를 신설했다. 짐작 가겠지만 이 기술에는 '수익 관리 yield management'라는 아주 지루한 이름이 붙었다.

그즈음 아메리칸 항공이 고안해 고객 충성도를 높인 마일리지 프로그램이라든지, 마지막 순간의 예약으로 빈 좌석을 채우는 슈퍼 세이버 SuperSaver 프로그램은 세이버보다 훨씬 더 눈에 띄었기 때문에 다른 항공사들도 얼른 따라했다. 하지만 그 이면에서 세이버가 마련해준 확고부동한 (그러나 별로 멋있진 않은) 유통 채널이라든가, 빅데이터를 이용한 수익 관리 기법은 오랜 세월 남들이 따라 하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이런 변화들이 아메리칸 항공을 구원했다.

# 15

트립이 공개적으로 팬암에서 중국 노선을 운항하겠다고 발표하자 팬암 이사회 구성원 중 두 명이 사퇴했다. 그들은 트립이 항공사를 비극으로 이끌고 있다고 확신했다. 항공 운항을 관장하는 연방위원회 의장은 트립의 친구였는데, 그는 정부에서 안전을 이유로 공개적으로 트립의 계획에 반대해줄 테니 계획을 철회하고 면을 세우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트립은 거절했다.

확률적인 어려움과 대중의 반대, 국가적 재난의 위협에 맞닥뜨렸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당연히 뉴욕 공립 도서관이다. 트립은 42번로와 5번가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 도서관 본관으로 갔다. 그는 안내 데스크에서 태평양을 오가며 무역을 했던 19세기 쾌속 범선들의 항해 일지를 보고 싶다고 했다. 트립은 수기로 적힌 오래된 문서들 한가운데서 호놀룰루와 상하이의 중간 쯤에 웨이크 섬이라고하는 무인도를 언급해놓은 부분을 찾아냈다. 미국의 어느 탐험대가 1899년 이 섬을 발견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트립은 워싱턴 여기저기에 문의를 해보았으나 누가 이 섬을 관장하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트립이 전화를 몇 통 돌리고 편지를 몇 통 쓴 끝에 대통령의 행정 명령이 떨어졌다. 몇 달 뒤 미국 해군은 팬암을 도와서 웨이크 섬에 공군 기지를 지었고, 얼마 뒤 하와이 서쪽의 또 다른 미국령 무인도 두 곳에도 기지를 건설했다. 바로 미드웨이와 괌이었다. 이렇게 섬 세 군데가 디딤돌이 되어 미국 본토와 아시아를 잇는 항로 개척이 가능해졌다. 나중에 이 섬들은 2차 세계대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11월 22일을 '팬 아메리칸 항공의 날'로 공표했다... 승무원들이 탑승하고 문이 잠겼다. 중간에 서게 될 비행장들이 차례로 무전을 보내왔다. "호놀룰루, 미드웨이, 웨이크, 괌, 마닐라. 스탠딩 바이." 트립은 모든 비행장이 준비됐다고 보고했고, 우정청장은 출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차이나 클리퍼의 엔진이 굉음을 냈다.

... 일주일 뒤 차이나 클리퍼가 돌아올 때는 기장인 에드 무직 Ed Musick이 미국에서 (린드버그의 뒤를 이어) 가장 유명한 조종사가 되어 있었고, 팬암은 가장 유명한 항공사가 되어 있었다... 성장하는 프랜차이즈에서 현금이 쏟아져 들어오자, 그 현금으로 다시 제품형 룬샷을 만들어 프랜차이즈를 키우는 선순환이 점점 더 속도를 높여갔다. 이 가속도가 이후 20년간 계속 쌓이면서 팬암을 놀라운 성공으로 이끌게 된다. 트립의 비전이 가져다준 영광의 정점이었다.

# 16

팬암이 국제 여행을 장악했던 것처럼 IBM은 수십 년간 컴퓨터 업계를 지배했다. 1981년 IBM이 올린 130억 달러의 매출은 2위부터 일곱 개 경쟁사의 매출을 합한 것보다 많았다(컴퓨터 업계를 흔히 'IBM과 일곱 난쟁이'라고 불렀다). 트립이 새로운 제트엔진에 뛰어들었던 것처럼 IBM도 새로운 사업(개인용 컴퓨터)에 뛰어 들었다. IBM은 컴퓨터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기에 개인용 컴퓨터의 핵심 요소 두 가지, 즉 소프트웨어와 마이크로프로세서를 각각 마이크로 소프트와 인텔 Intel이라는 작디작은 기업에서 아웃소싱했다.

마이크로 소프트는 직원이 고작 32명이었다. 인텔은 살아남기 위해 현금 수혈이 절박했다. 하지만 IBM은 이내 알게 된다. 개인 구매자들은 컴퓨터 박스에 적힌 브랜드보다는 친구들과의 파일 교환에 더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파일 교환을 쉽게 하려면 중요한 것은 컴퓨터를 조립한 회사의 로고가 아니라 소프트웨어와 마이크로프로세서였다. IBM은 전략형 룬샷의 변화를 놓쳤다. 변화는 고객들이 중시하는 지점이 바뀐 데서 비롯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소프트웨어와 인텔의 칩을 발 빠르게 도입한 복제품이 시장에 쏟아져 나오자 IBM의 시장점유율은 훅훅 줄어들었다. 1993년 IBM은 81억 달러의 적자를 기록했다. 창립 후 최대 규모의 적자였다. 그해에만 10만 명의 직원을 내보냈다. 역시 창립 후 최대 규모의 해고였다. 10년 뒤 IBM은 남아 있던 개인용 컴퓨터 사업 전체를 레노버 Lenovo에 매각했다.

한때 IBM의 조그만 공급자였던 마이크로소프트와 인텔의 현재 시가총액을 합하면 1조 5000억 달러에 육박한다. IBM의 열 배 이상이다. IBM은 제품형 룬샷을 정확히 예측해 전투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소프트웨어 표준이라는 중요한 전략형 룬샷을 놓침으로써 전쟁에서 패배했다.

# 17

랜드는 여름 캠프의 교관이 되어 '아이슬란드 크리스털'(천연 편광자, 자연광을 직선 편광으로 바꾸는 소자)을 이용해 테이블 위의 빛을 사라지게 만들었던 열세 살 때부터 자기만의 편광자를 만들고 싶었다. 100 년간 사람들은 빚의 신비를 풀기 위해 실용적인 편광자를 만들어 보려했으나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다. 나중에 랜드는 이렇게 말한 것으로 유명하다. "엄연히 중요하면서도 달성이 거의 불가능한 목표가 아니라면, 시작도 하지 마라." 그에게는 그 여름이 시작이었다. 그는 베개 밑에 《물리 광학 Phsical Optics》이라는 책을 넣어두고 잠이 들었다. 그는 이 책을 "선조들이 성경 읽듯 밤마다" 읽었다.

열일곱 살 때 랜드는 하버드 대학교에 등록했다. 몇 달 뒤 그는 학교를 떠났는데 아무런 야망도 없는 부유한 아이들에 둘러싸여 있는게 따분해서 그랬다고 한다. 랜드는 뉴욕으로 옮겨 갔다... 랜드는 타임스 스퀘어 바로 옆에 방 한 칸을 빌리고 지하실에 작은 실험실을 꾸려 밤낮없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훗날 랜드는 이렇게 말했다.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에서 알려주지 않는 법칙이있다. 무언가 할 만한 가치가있는 일이라면, 지나치리만큼 할 가치가 있다." 랜드는 집요하게 매달렸으나 그가 가진 편광자 아이디어에 어떤 행운도 따라주지는 않았다.

불가능한 도전과 마주한다면 어디로 가야 할까? ... 42번로에 있는 뉴욕 공립 도서관 본관으로 가야 한다. 이곳에서 랜드는 광학에 관해 찾아낼 수있는 책이란 책은 모조리 뒤졌다... 트립과 마찬가지로 랜드도 오래된 서제 귀퉁이에서 단서를 찾아냈다.

... 랜드는 미친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몇 번의 실패 끝에 랜드는 자석으로 작은 쇳가루를 정렬하는 것처럼 자기장을 이용해 결정들을 줄 세워 보기로했다. 랜드는 컬럼비아 대학교의 어느 물리학 실험실에 강력한 자석이 있다는 정보를 알고 있었다. 컬럼비아 대학교 학생이 아니어서 학교 시설을 이용할 수 없었던 랜드는 몰래 이 건물에 침입해 벽을 타고 6층 창턱까지 올라간 후 창문을 통해 실험실에 들어갔다. 그는 시커먼 결정 반죽을 동전 크기의 플라스틱 통 안에 얇게 펴서 넣어 왔다. 그 통을 자석 가까이 가져가자마자 시커먼 통이 투명해졌다. 자석이 마법을 부렸다. 미니어처 결정들을 정렬해 빛이 통과하게 만든 것이다. '편광.' 수백만 개의 미니어처 '밀레니엄 팰컨호'들이 플라스틱 통을 향해 달렸으나 수직으로 세워진 것들만 그 사이를 빠져 나왔다.

나중에 랜드는 이렇게 말했다. "단연코 내 인생에서 가장 흥분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세계 최초로 인공 편광자를 만들어 냈다. 그가 열아홉 살 때의 일이다.

# 18

1954년 랜드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고성능 카메라를 장착한, 높고 빠르게 날 수 있는 1인용 항공기를 만들자고했다. 랜드는 이제 곧 세계 최초 정찰기가 될 U-2의 카메라 기술 제공 업체 (아이텍 itek, 코닥)와 항공기 업체(록히드) 선정을 도왔다. U-2는 냉전 기간 처음부터 끝까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예컨대 1962년 쿠바에 러시아 미사일이 설치된 사실을 알아낸 것도 U-2가 촬영한 사진 덕분이었다.

1957년 랜드와 킬리언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두 사람은 적지에 유인 정찰기를 띄울 경우의 위험성을 걱정했다. (걱정은 곧 현실이 됐다. 1960년 소련은 러시아 상공을 날고 있던 U-2 한 대를 격추 해 조종사를 사로잡았다.) 랜드와 킬리언은 적지에 유인 항공기를 띄우는 대신, 카메라가 설치된 인공위성을 개발해 띄울 것을 제안했다. "위성의 거대한 망원 렌즈로 지구를 들여다 봅시다."

... 아이젠하워는 프로그램을 승인했다. 또한 그는 랜드와 킬리언이 추천한 '국가 정찰국'이라는 새로운 기관도 승인하고 공군과 CIA가 공동 관리하도록했다.

... 11월에 선출된 리처드 닉슨 Richard Nixon 대통령은 몇 주 지난 사진이 아니라 실시간 사진을 보고 싶다는 요구를 보좌진들에게 분명히 했다. 그는 "그의 2기 임기 내에" 사진을 볼 수 있기를 바랐다. 엎치락뒤치락 싸움은 이내 치열한 전투가 됐다.

한쪽에는 군의 거의 모든 지도부와 대부분의 내각 구성원이 있었다... 군은 점증적 해결책을 지지했다. 기존의 필름 인공위성에 팩스 기계 같은 스캐너를 추가하자고 했다... 그들에게는 CCD 칩을 이용한, 필름 없는 디지털 사진이라는 개념이 잘 믿기지도 않고 너무 불확실하게 느껴졌다. 도를 넘은 룬샷이었다.

에드윈 랜드의 입장은 정반대였다.

당연히 군의 주장이 승기를 굳혀가고 있었다. 1971년 봄에는 인공위성 내부에서 필름을 스캔하는 20억 달러짜리 프로그램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 1971년 4월에 열린 대통령 정보자문위원회 회의에서 랜드는 대통령에게 직접 발언했다. 그는 닉슨에게 필름 스캐너라는 아이디어는 "조심스러운 방안"인 반면, 디지털 기술은 "획기적 도약으로서 미국에 이 분야에서 의심할 바 없는 기술적 우위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했다. 그는 관료주의에 찌든 자들이 "대통령의 강력한 후원 없이는 커다란 재정적 위험을 짊어지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디지털이 왜 효과적일 수밖에 없는지, 그 위험이 얼마나 충분히 관리 가능한지, 디지털 프로그램이 왜 여러 장군들의 제안보다 우월한지 설명했다.

여기서 잠깐, 때는 '1971 년 봄'이었다. CCD를 설명하는 첫 논문이 겨우 몇 달 전에 발표된 상태였다. 상용 디지털 카메라를 최초로 생산할 소니나 캐논, 니콘 같은 기업들도 아직 디지털 사진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기 전이었다. 랜드는 그들 '모두'보다 앞서서 디지털을 옹호하는 중이었다.

9월 닉슨의 국가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 Henry Kissinger는 대통령이 랜드의 '획기적 도약책'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고 모두에게 알렸다. 군의 20 억 달러짜리 프로그램은 종료되어야 했다. (국가 정찰국의 한 역사가는 랜드가 결국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그가 "닉슨 대통령이 전임자들보다 더 강력하고 예리하고 빈틈없는 의사결정자로 기억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1976년 12월 11일 예정대로라면 닉슨의 2기 임기 말년이었어야 할 날에 (닉슨은 위터게이트 사건으로 1974년 8월 사임했다), 공군은 첫 번째 디지털 인공위성 KH-11을 발사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의 취임식 다음 날인 1월 21일 오후 3시 15분, CIA 국장 대행이었던 행크 노키 Hank Knoche는 백악관 지도실 Map Room에서 카터 대통령과 국가안보보좌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Zbigniew Brzezinski를 만났다. 노키는 테이블 위에 흑백사진 몇 장을 펼쳐놓았다. 우주에서 찍은 첫 번째 실황 사진으로, 대통령 취임식 장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 사진들은 브리핑 서류의 그 어떤 말보다 랜드의 '획기적 도약'을 잘 설명했다. 이제 미국은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바로 머리 위에서, 사실상 실시간으로, 천사나 볼 법한 각도로" 볼 수 있게 됐다.

# 19

디지털 사진이라는 제품형 룬샷이 폴라로이드를 쓰러뜨렸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다. 디지털 사진이라는 신기술에는 숨은 전략형 룬샷이 따라왔다. 방금 보았던 것처럼 랜드는 디지털 사진 기술을 완벽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디지털 사진의 잠재력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보았고, 고위직 장군들과 정치 지도자들 앞에서 디지털 사진의 가치를 옹호했다. 업계의 거의 모든 사람이 아직 디지털 사진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을 때 말이다.

랜드와 그의 경영진이 디지털을 일축한 이유는 30년간 필름을 팔아 돈을 벌었기 때문이었다. 폴라로이드는 카메라를 팔아서 버는 돈보다 즉석 사진의 카트리지를 팔아서 얻는 수입이 더 많았다. 디지털로 가면 필름이 설 자리가 없어지고 이는 수입이 없다는 뜻이 된다. 그래서 폴라로이드는 디지털이 "절대로 돈이 될 리 없다"고했다. 랜드가 디지털이라는 새로운 기술을 일축한 이유는 전략형 룬샷, 그러니까 디지털을 통해 수입을 창출할 수 있는 수많은 방법을 찾아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랜드는 후안 트립과 마찬가지로 본인의 강점(제품형 룬샷)에만 의지하고 약점(전략형 룬샷)을 직시하지 않았다...

폴라비전이 실패하고 제품 생산이 종료된 지 얼마 안 되어 랜드는 어느 프리랜서 조명 디자이너를 즉석 무비카메라가 가득한 창고로 데려왔다. 디자이너는 랜드에게 왜 "이토록 슬픈 풍경"을 보여주느냐고 물었다.

랜드가 대답했다. "자만심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여드리려고요."

# 20

바이오테크 업계에서 스타트업이 고전하다 보면 시간을 벌기 위해 훨씬 더 크고 돈 많은 사촌에게, 그러니까 대형 제약회사들에게 툴이나 서비스를 팔 때가 있다. 이때의 목표는 내부 팀에서 제품을 만들 수 있을 때까지, 세상이 깜짝 놀랄 신약 후보가 나올 때까지 살아남는 데 있었다.

영화계에서 픽사가 바로 그렇게 했다. 픽사는 훨씬 크고 돈 많은 사촌이었던 디즈니에게 툴과 서비스를 팔았다. 그리고 내부 팀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산물을 만들어낼 때까지 살아남았다.

그러나 픽사를 통해 잡스는 시간만 번 것이 아니라 전혀 예상치 못했던 또 다른 산물을 챙겼다. 바로 '아이디어'였다. 그는 룬샷을 육성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아 냈다...

1995년 추수감사절을 앞둔 저녁, LA에 있는 엘 캐피턴 극장, 조명이 어두워지고 커튼이 올라가더니 '버즈 라이트이어'라는 우주비행사 장난감과 '우디'라는 카우보이 장난감이 나타났다. 업계 최초로 순전히 컴퓨터로만 만든 장편 영화인 픽사의 <토이 스토리 Toy Story>가 3주 연속 미국 내 수입 1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이 영화는 아직도 영화 정보 사이트 로튼 토마토 Rotten Tomatoes에서 평론가 평가 지수 100 퍼센트를 유지 중이다.

#21

픽사 탄생의 주역인 에드윈 캣멀은 초기 단계의 영화 아이디어(룬샷)를 '못생긴 아기 Ugly Baby'라 부른다. 용어는 낯설지만 이 개념은 수백 년 전부터 있어온 것이다. 1597년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 Francis Bacon은 이렇게 썼다. "생명체가 처음 태어날 때의 모습이 형편없는 것처럼, 새로운 시대의 탄생인 모든 혁신도 처음에는 형편없는 모습이다." 캣멀은 영화에서 룬샷과 프랜차이즈('짐승 Beast') 사이에 균형을 유지하는 문제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독창성이란 바람 앞 등불과 같다. 또 최초의 순간에 독창성은 예쁜 것과는 거리가 멀 때가 많다. 그래서 나는 우리 영화의 초기 모델을 '못생긴 아기'라 부른다. 초기 모델은 아름답지 않다. 나중에 커서 될 어른의 미니어처에 불과하다. 진짜 못 생겼다. 서투르고, 채 갖춰지지 않았고, 연약하고, 불완전하다. 그게 자라나려면 시간과 인내라는 형태의 육아 과정이 필요하다. 이 말은 곧 그 아기가 짐승과 공존하기 위해 힘든 나날을 보내야 한다는 뜻이다. (..)

내가 짐승과 아기라고 말하면 다분히 흑백 논리처럼 들릴 수도 있다. 짐승은 다 나쁘고, 아기는 다 착한 것 아니냐고 말이다. 하지만 실제 현실은 그 사이 어디쯤에 있다. 짐승은 뭐든 잡아먹으려 들지만, 동기를 부여한다는 측면에서는 귀중한 존재다. 아기는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존재로서 엄청난 가능성을 품고 있지만, 보채기도 심하고 예측 불가능하며 밤에도 우리를 잠 못 들게 한다. 짐승과 아기가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한 핵심 열쇠는 다양한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 22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룬샷과 프랜차이즈는 너무나 다른 길을 걷기 때문이다. 그런 여정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열정적이고 지극히 헌신적인 사람들이 필요하다. 서로 아주 다른 역량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 즉 예술가와 병사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제임스 본드' 시리즈의 첫 작품이었던 <007 살인 번호 Dr. No>가 숱하게 거절당한 것은 시리즈의 첫 편이 만들어 질 때 흔히 나타나는 일이다. 미국 영화사들 입장에서는 제임스 본드가 너무 영국적이었다. 이언 플레밍 lan Fleming의 원작 소설은 "텔레비전용으로도 적합하지 않을 정도"였다. 10여 년이 지나자 시리즈를 아홉 편 정도 쓴 플레밍은 영화 제작권을 스튜디오에 직접 판매하는 것을 포기하고 미심쩍은 두 프로듀서에게 제작권을 넘겼다. 프로듀서 중 한 명은 직전에 본인의 영화사가 파산했다. 다른 한 명은 영화 제작 경험이 거의 없었다... 대여섯 명의 스타 배우가 주인공 역을 거절하자, 프로듀서들은 무명에 가까웠던 서른두 살의 숀 코너리 Sean Connery를 주연으로 발탁하기로 했다. 숀 코너리는 배우가 되기 전에 우유 트럭을 몰았다. 배급사는 이 영화를 미국 대도시에 팔 수 있을지 의심했다. "영국 촌놈인 트럭 운전사가 주인공"을 맡았기 때문이다. 결국 영화는 오클라호마주와 텍사스주의 자동차극장에서 개봉했다.

스물여섯 번째 본드 영화가 만들어질 때 쯤이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배우들은 이 영화에 너도나도 출연하겠다고 경쟁한다. 영화사들은 마케팅 판권을 사려고 줄을 선다. 현금이 쏟아져 들어온다. 이탈리아제 수제 양복을 입은 영국 스파이에게 티케팅 파워가 있다는 사실을 지금은 우리도 안다.

# 23

애플 구조 작전이 시작된 것은 1996년 12월이었다. 애플은 넥스트 인수를 발표하고 잡스를 자문으로 임명했다. 이는 애플이 숨넘어 가기 직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시도한 조치였다. 애플의 운영체제와 기기는 시대에 뒤처져 있었다. 앞서 마이크로소프트에 대항하기 위해 운영체제를 세 번이나 개편했지만 실패했다. 시장 점유율은 4퍼센트 이하로 추락했다. 어마어마한 재정 손실을 보고 큰 빚까지 떠안은 애플은 파산 직전에 몰려 있었다.

이사회는 회사를 인수할 사람을 찾으려고 대여섯 번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잡스를 1997년 중반에 임시 CEO로, 다시 1998년 초에는 정식 CEO로 격상시킨 것은 반전을 기대하는 마지막 몸부림처럼 보였고, 잡스가 회사를 구해낼 확률은 극히 낮아 보였다. 넥스트가 지키지 못한 약속이 늘어나면서 업계 애널리스트와 구경꾼 눈에 기술 리더로서 잡스의 신뢰성은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잡스가 회사를 넘겨 받았을 때, 한때 병사들을 무시했던 그의 태도는 싹 사라지고 없었다. 1998년 3월 잡스는 '재고 처리의 달인'으로 알려져 있던 팀 쿡을 컴팩에서 데려와 회사 운영을 맡겼다.

잡스는 전략형 룬샷을 보는 눈도 생겼다. 2001년 무렵 인터넷상에는 해적판 음악이 판을 치고 있었다. 그러니 맘껏 공짜로 다운로드 할 수 있던 음악을 '온라인 스토어'에서 팔겠다는 아이디어는 터무니없는 소리처럼 들렸다. 온라인으로 음악을 판매하면서, 고객이 자기 컴퓨터에 그 음악을 보관할 수 있게 해준다는 건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당시 온라인 음악 서비스는 구독제 형태만 가능했고 월 사용료를 내면 노래를 스트리밍해주는 방식이었다). '미친' 아이디어는 이게 끝이 아니다. 당시 노래를 앨범 단위가 아니라 한 곡씩 별개로 파는 사이트는 없었다. 곡당 99센트에 말이다. "미쳤구만." 누구라도 잡스에게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게 절대로 돈이 될 리가 없지."

엿새 만에 아이튠스 iTunes 스토어의 다운로드 횟수가 100만 곡을 넘어서자 잡스의 아이디어는 더 이상 그렇게 미친 소리처럼 들리지 않았다. 무슨 새로운 기술을 도입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아무도 성공하리라 예상치 못한 전략상의 변화를 시도했을 뿐이다.

# 24

물론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 같은 애플의 제품형 룬샷들도 업계를 바꿔놓았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애플이 그토록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디자인과 마케팅이 훌륭했던 점 외에 (제품에 들어간 기술 대부분은 다른 사람이 발명한 것이었다), 전략형 룬샷의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업계 사람들 대부분이 단념한 전략, 이른바 '닫힌 생태계'를 활용한 덕분이다...

애플로 돌아온 잡스는 복제품을 차단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사회의 승인을 요구했다. 파산을 면하려고 필사적으로기를 쓰고 있던 그때 애플은 기존 계약을 한 번에 취소하느라 1억 달러 이상을 썼다. 하지만 바로 이 전략형 룬샷, 즉 생태계를 닫아버린 일이 애플 제품을 급부상시키는 원동력이 됐다. 매력적인 신제품은 소비자를 끌어들였고, 이미 쳐둔 울타리는 이탈을 어렵게 했다...

잡스는 애플을 구조하는 과정에서 '모세의 함정'을 탈출하는 방법을 보여줬다. 그는 제품형 룬샷과 전략형 룬샷이라는 두 가지 유형의 룬샷을 모두 육성하는 법을 배웠다. 그는 상태를 분리했다. 애플 제품의 수석 디자이너였던 조니 아이브는 오직 잡스에게만 보고했고, 조니 아이브의 스튜디오는 "맨해튼 프로젝트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원자 폭탄 개발 프로젝트로, 뉴멕시코주 로스앨러모스에 연구기지가 있었다) 때의 로스앨러모스처럼 접근 불가" 구역이었다. 잡스는 이미 예술가와 병사 둘 다를 사랑하는 법을 배운 후였다. 잡스의 뒤를 이어 CEO가 될 훈련을 받은 사람은 팀 쿡이었다. 잡스는 각 상태에 딱 맞는 툴을 만들었고, 애플에 관한 수많은 책과 기사에 설명된 것처럼 신제품과 기존 프랜차이즈 사이에 균형 잡힌 긴장감을 유지했다. 잡스는 룬샷을 지휘하는 모세가 아니라, 룬샷을 육성하는 정원사가 된 것이다.

#25

"회사를 어떻게 세울 것인가 하는 문제 자체가 정말로 매력적이죠." 잡스는 그의 전기를 쓰고 있던 월터 아이작슨 Walter Isaacson에게 그렇게 말했다. "때로는 회사 자체가, 회사를 조직하는 방식이 바로 최고의 혁신이더군요."

잡스는 군사 역사가 제임스 백스터 James P. Baxter가 50년 전에 내린 결론과 똑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백스터는 버니바 부시의 시스템이 2차 세계대전의 물길을 돌리는 데 성공한 일을 반추하며 이렇게 썼다. "그 사이 어디선가 기적이 일어났다면, 그 장소는 제때 성공할 확률을 높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 조직 구성 분야일 것이다."

# 26

파크는 '모세의 함정'과 상반되는 사례다. 파크는 상분리에 기가 막히게 성공했다. 그러나 룬샷들은 모세의 명령으로 바깥에 나오기는커녕, 내부에서 무시받고 적극 진압당해 영영 수면 위로 올라오지 못했다("'컬러'는 미래 업무가 아니다").

파크는 결코 보기 드문 사례가 아니다. 이런 '파크의 함정'(룬샷이 계속 주차된 채 출발하지 못하는 현상)은 흔한 일이다. 예를 들어 1975년 코닥 연구소에서는 스티브 새슨 Steve Sasson이 세계 최초의 디지털카메라 가운데 하나를 개발했지만, 코닥은 그 제품을 10년 동안이나 묻어뒀다.

리더는 좋은 의도로 격리된 뛰어난 연구 집단을 만들어 창조와 발명에 적합한 환경에 배치할 수 있다. 제록스의 리더들이 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새로운 아이디어에 대해 프랜차이즈 그룹 내에서는 언제나 저항이 일어난다. 버니바 부시의 그룹에서 나온 수많은 기술에 대해 군에서 처음에는 저항했던 것처럼 말이다.

균형과 소통을 제대로 유지하려면 내부의 장벽을 극복하게 도와줄 손길이 필요하다. 어느 모세의 보좌진의 손길이 아니라, 정원사의 손길처럼 부드러운 손길이 필요하다. 아이디어가 이전되는 데 힘을 너무 받거나(추상같은 명령) 힘이 부족하면(아무 지원 없음), 유망한 아이디어와 기술도 실험실에서 썩게 될 것이다. 그러면 조직은 그 기술을 상실하고, 시간과의 싸움에서 질 것이며, 그 기술을 발명한 사람의 충성심을 잃게 된다. 핵심 인재는 회사에 오래 머물지 않을 것이다.

# 27

아이젠하워와 매컬로이는 대규모 조직 내부에서 급진적 아이디어가 저항에 부닥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이젠하워는 기나긴 군 경력을 통해 육해공군 사이의 경쟁이 진보를 늦추는 광경을 직접 목격했고, 사적으로 또 공적으로 그 사실에 대해 불만을 제기한 바 있었다. 아이젠하워가 외부인 매컬로이를 국방부 장관 자리에 앉힌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다. 아이젠하워는 군이나 연방정부와 아무런 연줄이 없는 외부인이 들어와서 시스템을 맘껏 흔들어주기를 바랐다. 스푸트니크를 둘러싼 과대 선전은 바로 그런 흔들기를 시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스푸트니크가 발사되고 한 달 지난 1957년 11월, 매컬로이는 '과감한' 연구 계획에 자금을 지원하고 자신에게 직접 보고하는 새로운 기관을 만들겠다고 했다. 군에서 자금 지원을 꺼리는, 아직 증명되지 않은 기술을 개발하는 기관이었다...

매컬로이는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소비자 제품 회사 연구소를 세우는 데 일조한 바 있었다. 그래서 그는 연구소에 파묻혀 현장으로 이식되지 못하는 기술, 혹은 현장의 피드백에 빠르게 대응하지 못하는 연구소는 무용하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다시 말해 매컬로이는 부시-베일 법칙의 처음 두 가지 핵심인 '상분리'와 '동적평형'을 알고 있었고, 그 내용을 인가서 초안에 넣었다.

그의 초안이 과학연구개발국과 닮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아이젠하워도, 매컬로이도 과학 분야에 관한 배경은 없었으나 버니바 부시와 함께 일했던 과학자들로부터 세심한 조언을 들었다. 자문가들 중에는 MIT 총장 제임스 킬리언은 물론이고, 노벨상 수상자로서 마이크로파 레이더와 맨해튼 프로젝트에 모두 참여했던 어니스트 로런스 Ernest Lawrence도 있었다.

1958년 2월 7일 매컬로이의 새로운 조직이 공식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이 조직을 고등연구계획국 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이라고 불렀다. 버니바 부시의 과학연구개발국이 재탄생한 것이다.

# 28

고등연구계획국은 1996년 '방위 defense'라는 말이 앞에 붙어서 '방위고등연구계획국 DARPA'으로 개칭됐다.

... 수많은 악취미와 실패에도 불구하고 방위고등연구계획국의 룬샷 중에는 산업을 바꾸고 새로운 학문 분야를 창조 한 것들도 있었다. 고등연구계획국의 초창기 컴퓨터 네트워크인 아파넷 ARPANET은 인터넷으로 진화했다. 인공위성 기반의 지리 위치 시스템은 처음에는 군용 GPS로, 다음에는 소비자용 GPS로 진화하여 지금은 거의 모든 차량과 스마트폰에 사용되고 있다. 군인들이 음성으로 명령을 내릴 수 있게 보조해주려고 만든 소프트웨어 프로젝트가 오늘날 모든 아이폰에 탑재된 '시리'로 발전했다. 전 세계의 지진 감지 센서는 방위고등연구계획국이 핵실험과 지진을 구별하려고 설치한 것인데, 최초의 '핵실험 금지 조약'으로까지 이어졌다. (다른 군 부서들은 진동으로 핵폭발을 감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 '핵실험 금지 조약'은 무의미하다며 추구하지 말자고도 했다. 그들은 방위고등연구계획국이라는 작은 조직이 지진학을 연구하는 것을 보고 "무능력한 떼거지들"이라며 일축했다.) 이후 지진학 프로젝트는 활기를 띠었고 결국 판 구조론까지 입증했다. 이 이론은 이후 지질학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 29

전통적 구조에서 승진 사다리는 당근 전략의 결정판이다.이 목표를 이루면 더 큰 사무실과 더 많은 연봉, 더 많은 직원이 주어진다. 그리고 이 똑같은 승진 사다리라는 당근이 사내 정치라는 잡초가 확산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방위고등연구계획국은 작은 스타트업들의 느슨한 모임처럼 운영된다. 애초에 승진 사다리라는 게 없다. 100여 명의 프로그램 매니저들은 각각 프로젝트 하나 또는 하나의 연구 분야를 이끈다. 이들에게는 이례적인 수준의 자율성과 가시성이 주어진다. 매컬로이의 브랜드 매니저들과 비슷한 셈이다. 예를 들어 2009년 9월 공군의 시험비행 조종사였던 더그 위커트 Doug Wickert는 교환 근무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방위고등연구계획국의 여러 팀에서 순환 근무를 했다. 캘리포니아 대학교 공과대학에서 기계공학 박사학위를 받은 리기나 두건 Regina Dugan은 얼마 전 방위고등연구계획국의 팀장으로 임명된 상태였다. 위커트와의 첫 만남에서 두건은, 2주 뒤에 "여느 프로그램 매니저와 다름없이" 팀원들과 함께 아이디어를 내라고 위커트에게 주문했다.

# 30

당시 두건 등 방위고등연구계획국 사람들은 컴퓨터 전문가들 사이에서 1969년 아파넷의 출범을 원년으로 삼는 인터넷 탄생 40 주년을 기념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아파넷이라는 원거리 네트워크는 1969년 10월 29일 LA 소재 캘리포니아 대학교의 찰리 클라인 Charley Kline의 컴퓨터가 캘리포니아주 멘로파크 소재 스탠퍼드 연구소의 컴퓨터와 통신을 하면서 시작됐다.

위커트는 인터넷 탄생 4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전국의 사람들을 결속시켜 시간 내에 문제를 풀게 해주는 인터넷의 힘을 시험해보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위커트의 새로운 아이디어는 바로 빨간색 풍선이었다. 방위고등연구계획국이 비공개로 전국의 열 개 공원에 열 개의 빨간색 기상 관측기구를 띄운 다음, 이 기구가 얼마나 빨리 발견되는지 보자는 것이었다. 위커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처음엔 그냥 장난 같은 거였죠. 그런데 진화한 겁니다."

한 달 뒤인 2009년 10월 29일 인터넷 기념일에 두건은 방위고등연구계획국의 '레드 벌룬 챌린지 Red Balloon Challenge'를 발표했다. 기구는 12월 5일 토요일 아침 공원으로 가져가 나무나 벤치에 묶어놓기로 했다. 가장 먼저 열 개의 기구를 모두 찾아내는 팀에게는 4만 달러의 상금이 주어진다. 발표를 미리하지 않은 것은 의도적이었다 (발표에서 대회 날까지는 겨우 37일 남아 있었다). 실제 위기 상황에서 비슷한 팀들이 겪는 것처럼, 도전하는 팀들에게 준비 할 시간을 적게 주려는 것이었다.

드디어 12월 5일 토요일 아침 10시 플로리다 주에서 오리건 주까지 전국의 공원에 기구가 올라갔다... 방위고등연구계획국은 오후 5시가 되면 기구를 내리고 이런 과정을 최장 일주일까지 반복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겨우 '8시간 52분 41초 만에 MIT의 어느 팀이 열 개 장소를 모두 찾아냈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이 팀이 이 대회에 관한 소식을 겨우 4일 전에 들었다는 사실이다.

이 팀은 어떻게 아홉 시간도 안 걸려 모든 풍선을 찾아냈을까? 그 비결은 창의적 보상 시스템을 가진 네트워크를 발족시킨 데 있었다. MIT 팀은 기구 하나당 총 4000 달러의 상금을 배당했다. 만약 수전이란 사람이 빨간색 기구를 발견하고 그 사실을 팀의 웹사이트에 보고하면, 수전에게 2000달러가 지급된다. 만약 수전에게 이 대회에 관해 이야기 해준 사람이 그레그라면, 그레그에게는 남은 상금의 절반인 1000달러가 지급된다. 만약 그레그에게 대회에 관해 말해준 사람이 캐런이라면, 캐런에게는 남은 금액의 절반인 500달러가 지급된 다. 그런 식으로 보고 과정에 개입한 모든 사람에게 일정액의 상금을 지급하는 것이 보상 시스템의 핵심 내용이었다(추적이 끝났을 때 처음의 4000달러에서 혹시라도 남은 금액이 있다면 자선단체에 기부하기로 했다).

이 시스템의 똑똑한 점은 집 밖을 나가지 않아 절대로 기구를 목격할 수 없는 사람들조차 함께 참여해 MIT의 승리를 돕게 된다는 점이었다. 이 모든 관계는 팀의 웹 사이트(이틀 만에 만들었다)를 통해 추적됐다. 기구 사냥꾼들은 대부분 동네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종종 멀리있는 연줄에 도움을 청하는 경우도 있었다. 다시 말해 작은 세상 네트워크, 즉 '레드 벌룬의 여섯 단계'인 셈이었다. MIT 팀은 36시간 만에 4400명의 사람들을 모집했다.

# 31

2등을 차지한 것은 조지아 공과대학교 팀으로 MIT 팀보다 3주나 먼저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들은 "도넛과 피자, 아드레날린을 연료 삼아" 검색 순위에 올라갈 수 있는 웹사이트뿐만 아니라 페이스북 페이지와 구글 보이스 전화번호를 만드는 등 맹렬히 작업했다. 그럼에도 이들이 모집한 사람들은 1400명에 불과했다. 조지아 공과대학교 팀은 이타주의에 승부를 걸었다. 이들은 만약 1등을 하면 수익금을 모두 자선단체에 기부하겠다고 약속했다.

지나고 보니 '레드 벌룬 챌린지'는... '인센티브는 우리 생각보다 중요하다'는 교훈 외에도, 애초 대회에 참가했던 이들 중 누구도 예상치 못한 놀라운 교훈을 많이 남겼다. 이 교훈들은 저명한 과학 저널에도 많이 실렸다. 또한 그 내용은 우리가 현대적 네트워크를 이용해 시급한 문제를 해결할 때 많은 사람을 동원하는 방법에 관해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실종 어린이나 군인을 찾을 때라든지, 재해 복구를 위한 자원을 조달할 때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런 교훈은 계속해서 새로운 도전을 통해 시험대에 오르고 있다.

# 32

방위고등연구계획국 내에서 '레드 벌룬 챌린지' 같은 미친 프로젝트가 성공할 수 있는 이유 중에 하나는 이곳에 승진 사다리가 없기 때문이다. 프로젝트 매니저는 흔히 2년에서 4년 정도의 정해진 기간 동안 고용된다(이들의 사원증에는 계약 만료 시점이 표시되어 있다). 방위고등연구계획국의 구조에서는 사내 정치에 조금도 시간을 들일 이유가 없다. 회의 때 똑똑한 사람처럼 보일 이유도, 동료의 '또라이' 같은 룬샷의 결점을 강조해 그를 깔아뭉갤 이유도 없다. 누구의 비위를 맞춰 진급을 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33

방위고등연구계획국의 원칙들은 자율성과 가시성을 높여주고 내부의 아이디어보다는 외부의 최고 아이디어에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이 원칙들을 모든 회사에 똑같이 적용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떤 조직이든 자율성과 가시성, 소프트 에쿼티를 증진시킬 기회는 있다.

그 한 예가 바로 개방형 혁신이다. 개방형 혁신은 기업이 고객(보통 얼리 어답터나 열혈 팬) 혹은 비즈니스 파트너(예컨대 공급자나 마케팅 파트너)와 함께 새로운 아이디어와 기술, 시장을 개발하는 것을 말한다. '레드 벌룬 챌린지'는 한 조직이 전국에서 최고의 인재를 영입해 네트워크 이론의 중요 문제,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을 빠르게 동원할 수 있는가?'를 함께 생각해본 사례다.

기술 업계에서는 이런 사례가 흔하다. 소프트웨어 기업은 늘 마무리되지 않은 제품을 긴밀한 개발자 커뮤니티에 공유하여 빠른 피드백을 받는다. 바이오테크 회사는 제품을 개발할 때 대학에 있는 과학자들과 긴밀히 협업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에는 이런 아이디어가 기술 업계를 넘어 확대되고 있다. 맥주 회사 쿠어스 Coors Brewing Company는 개방형 혁신을 통해 냉각 활성 맥주 캔을 개발했다. 마시기에 이상적인 온도(쿠어스에 따르면 섭씨 6도에서 10 도라고 한다)에 도달하면 맥주 캔에 그려진 산 모양의 고로가 흰색에서 파란색으로 변하는 제품이었다. 식료품 회사 크래프트 Kraft Foods는 개방형 혁신을 통해 녹지 않는 초콜릿을 개발했다.

개방형 혁신의 좋은 점은 한둘이 아니다. 기업은 신선한 아이디어를 접할 수 있고, 그런 아이디어를 내는 사람은 기업이 가장 함께 하고 싶어 하는 열정을 가진 사람일 때가 많다. 도넛과 아드레날린의 힘으로 달렸던 조지아 공과대학교의 레드 벌룬 팀이나 MIT의 즉흥 팀처럼 말이다. 동시에 기업은 동료들의 인정이라는 소프트 에쿼티를 개선할 수있다. 물론 개방형 혁신은 경쟁자들에게 원치 않는 기업 비밀을 들킬 수 있다는 단점도 있으니 도입할 때 잘 가늠해 보아야 한다.

연구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면서 많은 기업들이, 특히나 장기적으로 더 민첩한 조직을 만드는 측면에서는 폐쇄적이고 비밀스런 모델보다 개방형 혁신의 이점이 더 많다고 판단하고 있다.

# 34

보편적 진리에 대한 케플러의 생각은 급진적이었다. 타원형 궤도(심지어 궤도라는 아이디어 자체), 태양의 힘이 행성을 움직인다는 생각, 자연법칙이 이런 운동을 관장한다는 생각, 정교한 측정을 통해 그런 법칙을 추론해야 한다는 생각 모두 케플러가 도입한 것이었고, 새로운 발상이었다. 케플러는 뉴턴보다도 더 과감하게 과거와 이별했다. 뉴턴은 (주로) 케플러의 궤도를 설명하겠다는 목표로 기존 원리들을 통합했다. 케플러는 300년 뒤에 나타날 아인슈타인에 가장 근접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케플러가 자신과 '같은 정신'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케플러는 종교적 박해도, 가난도, 개인적 비극도, 불신하는 관객도, 신비주의적 사고의 유산도 모두 극복해냈기 때문이다...

케플러가 '화성과 사투'를 벌인 결과를 <신 천문학>으로 출판하고 수십 년이 지난 후에야 천문학자나 점성술가, 항해사는 케플러가 만든 시스템이 지구를 중심으로 하는 그 어느 이론보다 잘 들어맞는다는 사실을 서서히 알게 됐다. 갈릴레이가 목성의 위성들을 발견하고, 윌리엄 길버트 William Gilbert가 자석으로 여러 실험을 하고, 로버트 훅이 만유인력을 추측하고, 궁극적으로 뉴턴이 이것들을 통합해 여러 법칙을 세우면서 케플러의 급진적 아이디어는 결국 새로운 천문학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널리 받아들여지게 됐다. 권위자의 판결이 아니라 실험 결과로써 진리를 판단하게 된 것이다.

케플러가 죽고 수십 년이 지난 17세기에 과학적 방법은 유럽 전역에서 급부상하며 폭발적으로 확산됐다. 이에 따라 촉발된 각종 산업 도구의 혁명은 인류 역사상 유례없이 빠르고 큰 규모의 변화를 몰고 왔다.

1만 년 동안 인간의 기대 수명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1800년에서 2000년 사이에 두 배가 됐다. 기원후 1년부터 1800년까지 전 세계 인구는 매년 채 0.1퍼센트도 증가하지 않았다. 20세기 중반이 되자 인구 증가율은 20배 수준으로 껑충 뛰었다. 전 세계 평균 1인당 경제 생산은 2000년간 거의 그대로(1990년 달러화 기준으로 환산했을 때 450~650달러 수준)였다. 1800년 이후 1인당 경제 생산은 자그마치 '1000퍼센트'가 성장했다.

서유럽의 조그만 민족국가들, 특히 영국은 그 룬샷을 타고 전 세계를 지배했다. 오늘날 글로벌 비즈니스 언어가 중국어나 아랍어, 힌디어가 아닌 영어가 된 주된 이유다.

# 35

그러나 룬샷 배양소가 있다는 사실(상분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서유럽 현대 과학의 부흥을 설명하는 유럽 중심의 역사는 종종 대제국과의 꾸준한 교류의 중요성을 간과한다(동적평형). 인도의 학자들과 이슬람 천문학자들에게서 빌려 온 수학이 없었다면 코페르니쿠스의 이론도 존재할 수 없었다. 중국에서 수입해 온 항해술, 교통, 통신, 관개시설, 채굴 기술, 군사 기술 등이 없었다면 유럽에 잉여의 부나 지식층은 없었을 테니 천체의 움직임에 대한 이론을 세우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 모든 게 서유럽이 임계질량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자원을 제공해주었다(임계질량).

임계질량은 중요한 요소였다. 수천 년간 유지되어온 독단적 교리를 깨기 위해서는 하나가 아니라 줄줄이 엮인 수많은 룬샷이 필요했다. 그런 룬샷 중 일부는 훨씬 오래전에 다른 사회에서 개별적으로 출현했다. 행성이 태양 주위를 돈다는 아이디어나 미적분의 중요한 전신은 케플러나 뉴턴보다 몇백 년 앞서 이미 인도 케랄라의 수학, 천문학 전문학교에서 나타났다. 그러나 중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들 아이디어에는 불이 붙지 못했다.

반면 임계질량을 달성한 유럽 전역에서는 조화로운 여러 발견이 동시에 일어났다. 망원경(네덜란드)이 발명되자 하늘을 살펴서(이탈리아) 타원 궤도를 확인했으며(독일), 지구의 운동(폴란드)에 대한 발견은 결국 관성에 대한 아이디어(이탈리아) 및 기하학(프랑스)과 합쳐져 통일된 운동이론(영국)을 낳았다. 이게 바로 임계질량이다.

중국, 이슬람, 인도의 제국들은 대형 민족국가다. 당시에 들끓는 용광로 같았던 서유럽 국가들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위한 세계의 룬샷 배양소였다. 수백 개의 작은 영화사가 새로운 영화의 룬샷 배양소 역할을 하고, 수백 개의 작은 바이오테크 기업이 신약 개발의 룬샷 배양소 역할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국가들의 세계에서도 마이너리거가 성장하면 메이저리거가 될 수 있다. 영국도 디즈니나 암젠과 마찬가지로 작디작은 마이너리거로 시작했다. 두 회사와 마찬가지로 영국도 강력한 룬샷(모든 룬샷의 어머니)의 예상치 못한 성공을 발판으로 성장했다. 영국은 그 아이디어를 무기화해 산업화를 이루어 메이저리거로 진화했고, 자신들의 언어와 관습을 전 세계에 확산시켰다.

# 36

파괴적 혁신이라는 개념에 대한 최근의 논란을 다룬 기사에서 크리스텐슨은 자신의 정의에 따를 때, 왜 우버는 파괴적 혁신이 아니며 아이폰 역시 그 시작은 존속적 혁신이었는지 설명했다... 우리는 신규 진입자가 아니라 기존의 대형 항공사였던 아메리카 항공이 항공 업계의 최고가 된 과정을 살펴보았다. 항공 업계의 규제 철폐 이후 아메리칸 항공은 하이엔드 고객을 상대로 다양한 반짝거리는 '존속적' 혁신을 선보여 업계 리더가 됐다. 그러나 '파괴적' 혁신을 실천하여 염가에 특화된 사업을 펼친 수백 개의 스타트업 항공사는 망했다.

트랜지스터와 구글, 아이폰, 우버, 월마트, 이케아, 아메리칸 항공의 빅데이터, 그리고 그 밖에 업계를 바꿔놓은 여러 아이디어가 모두 처음에는 존속적 혁신이었고 수백 개의 '파괴적 혁신' 기업이 실패했다면, 아마도 존속적 혁신과 파괴적 혁신을 구분하는 것은... 실시간으로 사업을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다른 개념들만큼 중요하지는 않다.

...어쩌면 당신의 제품이나 비즈니스 모델에 관해 당신이 진실이라고 확신하는 내용이 모두 옳을 수 있다. 또 당신의 신념에 어긋나는 미친 아이디어를 늘어놓는 사람들이 다 틀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만일 그게 아니라면 어쩔 텐가? 경쟁사의 기자회견 기사에서 그 사실을 확인하기보다는 자체 실험실이나 파일럿 테스트에서 발견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런 사람들의 아이디어를 묵살하면서 당신은 어디까지 위험을 감수할 자신이 있는가?

팀이나 기업, 국가를 설계할 때는 룬샷을 육성할 수 있는 방식, 그러면서도 프랜차이즈와 섬세한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방식을 취해야만 건륭제의 제국과 같은 끝을 보지 않을 수 있다. 건륭제는 "이상하고 기발한 물건"이라고 무시했지만, 세월이 흐르고 보니 그의 제국을 파멸시킨 것은 바로 그 이상하고 기발한 물건을 손에 쥔 적들이었다.

# 37

런던 왕립학회와 전시 룬샷 배양소 역할을 했던 버니바 부시의 과학연구개발국, 시어도어 베일의 벨 전화연구소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당대의 가장 큰 룬샷 배양소였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역사상 가장 큰 룬샷 배양소였을 것이다. 이 기관들은 과학혁명을 일으키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트랜지스터를 발명했다.

중국과 이슬람, 인도 제국은 쌓아놓은 부와 역사적 이점에도 불구하고 왜 과학혁명을 놓쳤을까? 마이크로소프트가 모바일 사업을 놓친 것과 머크가 단백질 약을 놓친 것, 대형 영화사들이 <나의 그리스식 웨딩 My Big Fat Greek Wedding>을 놓친 것과 같은 이유다. 룬샷은 프랜차이즈에 치중하는 제국이 아니라, 룬샷 배양소에서 번성한다. 룬샷에 능한 것과 프랜차이즈에 능한 것은 한 조직이 갖는 두 가지 상태다. 그 조직은 팀일 수도, 회사일 수도, 국가일 수도 있다. 그게 바로 창발의 과학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교훈이다.

그게 뭐가 되었든, 다음번 혁명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모든 국가와 지도자들이 버니바 부시와 시어도어 베일의 교훈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부시에게 쓴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성의 새로운 전선이 우리 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이 전쟁을 치르는 동안 우리가 가졌던 비전과 대담함, 추진력을 가지고 그 전선을 개척한다면, 더 유익한 일자리를 더 많이 만들어내고, 더 보람찬 삶을 가꿀 수 있을 것입니다."

약간의 도움과 약간의 과학이 있다면 우리 각자도 개인으로서, 팀원으로서, 그리고 시민으로서 자신만의 끝없는 전선을 넓혀나갈 수 있을 것이다.